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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가에 장관 할 인물이 그렇게 없나?
- 이재명 정부가 지난 30일, 다수의 장관 후보자를 발표했는데, 그중에 기본소득당 원내 대표이며, 비례 대표 국회의원인 용혜인 씨를 성평등가족부장관 후보자로 내정하였다. 용 의원은 어떤 사람인가?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위성 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서 비례로 당선되었고, 22대 총선에서도 역시 민주당의 위성 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로 당선되었다. 문제는 그가 국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가 국회에서 입법 발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활동반자관계법’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 법은 비혼•동성 커플도 부부 가족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동성혼을 허용하는 악법이다. 또 ‘포괄적차별금지법’에 공동 발의하였다. 이 법은 사상, 종교, 동성애, 교육, 안보, 국방, 기업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차별금지를 당했다는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그 책임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악법 중에 악법이다. 또 ‘군대내동성간성행위처벌조항폐지법’에도 공동 발의하였다. 군대는 위계와 질서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런데 군대 안에서 마음대로 상급자와 부하가, 장교와 사병이 동성애를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군대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낙태죄완전폐지법’에도 공동 발의하였다. 형법상 낙태죄를 완전히 삭제하자는 것이다. 얼마나 생명 경시를 하는 악법인가? 또 ‘집시법개정안’도 대표 발의하였다. 즉 100명 이하의 옥외 집회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개최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어 장소 불문하고 사람들이 어디든지 몰려가 집회를 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령 국가 안보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곳, 국가 기밀이 있는 곳에 기습적이고 반복적인 시위가 벌어진다면, 우리 나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관인 것은 온갖 세금을 걷어, 국민들에게 현금으로 나눠주자는 법안도 여러 개를 발의하였다. ‘기본소득탄소세법’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것은 탄소세로 기업들로부터 수십 조원을 걷어, 현금을 국민들에게 배당하자는 것이다. 또 ‘기본소득형토지보유세법’도 대표 발의하였다. 이는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0.7~1.3%의 토지세를 걷어 국민들에게 배당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1주택장기보유특별공제폐지법’도 공동 발의하였다. 서민들의 집 한 채 가질 자유마저 빼앗자는 것이다. 거기에다 ‘반도체초과이익환수법’ ‘기본소득 공론화법’등을 대표 발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장관이 되어도 비례 대표 국회의원직은 내려놓지 않는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국가 공직을 이용하여 나라에 빨대를 깊이 꽂겠다는 행태가 아닌가? 이런 사람이 장관이 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나라의 장관이 되려면, 그 분야에서 적어도 국가 발전과 사회적 책임과 국민들의 행복을 만들어 갈 식견과 능력과 경력과 정무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장관을 할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공석으로 두는 것이 낫다. 항간에서는 용 후보자가 장관이 되지 않아도, 이재명 정부나 장관 후보자나 서로 손해날 것이 없다고 한다. 국가의 국정을 만들어 가는데, 이런 태도는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고, 바보로 보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나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곧 정권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장관을 아무나 세울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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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가에 장관 할 인물이 그렇게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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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계 2:1-7)
-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 권면은 오늘날 개인과 교회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교회는 무엇을 경계해야 하고, 무엇을 소망하며 열심을 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교통, 상업, 무역의 중심지였지만 타락과 우상 숭배로 복음을 전하기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성실하게 충성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아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단자들을 “사나운 이리”라고 경계할 것을 에베소 교회에 당부하였습니다.(행 20장)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잘 훈련되어서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성이 있었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한”(3절)은 낙심하거나 지치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긴 시간 온갖 유혹과 핍박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인정하신 후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정죄가 아닌 사랑과 격려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처음 주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기억하며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떨어졌는지”(5절)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믿음을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믿음이 변질되었다면 말씀에 불순종한 죄악의 쓴 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는 말씀은 처음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그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 외에 처음 사랑을 회복할 방법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여전히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교회를 그 자리에서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첫째, 회개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놓치면 회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히 6장) 둘째, 분리를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자를 교회 안에서 솎아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니골라”(6절)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행 6:5) 그러나 에베소 교회 안에서 니골라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한 번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방종과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니골라의 교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가 처음부터 받은 신임 때문에 추종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 여러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혹시 교인 중에 구원에 대한 믿음의 방종이나 십자가의 말씀과 교회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요? 그러한 생각은 미혹의 올무에 걸린 것이며 믿음의 삶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a절) 일곱 교회에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적 각성과 회심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철저하게 목양을 받고 있었고 성도는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경고하신 것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b절) 하나님의 낙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계 22장) 그곳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뜻합니다. 즉,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구별되게 사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금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회개하고 주님과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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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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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21.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 6:16)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15절을 통해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적당히 죄를 지으며 편하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방종의 유혹을 다루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습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되는 무법지대가 아니라 죄의 잔인한 통치권이 박탈당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의의 주인에게 소속이 바뀐 은혜의 통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이르면 바울은 이 소속의 문제를 인간의 행동과 순종이라는 아주 실제적이고 명확한 영적 원리를 통해 선포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우리의 영적 무지를 깨웁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 흐르는 아주 냉혹하고 선명한 법칙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완벽하게 독립적인 주권을 행세하며 사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 들여다보면 자신이 순종하고 따르는 그 대상의 지배를 받게 되는 종의 원리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중립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소속의 두 갈래 길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첫 번째 길은 죄의 종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내 육신의 정욕과 이기심과 상처가 소리치는 대로 나 자신을 죄의 유혹에 내어주고 순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죄의 결박에 묶이게 됩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와 “네 마음대로 하라”며 가짜 자유를 속삭이지만 그 끝은 잔인한 사망입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이 단절되고 삶이 허무와 정죄와 고통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사망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은 나를 피 값으로 사신 새로운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 자신을 내어드리고 순종하는 삶을 뜻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는 사탄이 결코 흔들 수 없는 거룩한 의가 나타나며 생명의 풍성함과 하늘의 기쁨이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죄의 유혹 앞에 흔들리고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이유는 내 신분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매 순간 내 생각과 지체를 누구에게 순종의 종으로 내어주고 있는지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미 법적 통치권을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 주인 행세를 하며 우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내 감정이나 정욕을 따라 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을 내어주면 스스로 다시 죄의 지배 아래 종노릇 하는 비참한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옛 습관을 자극하며 명령을 내릴 때 종의 원리를 기억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죄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는 자유인이다. 내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의 주인은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나는 내 생각과 눈과 입술과 손발을 죄에게 내어주지 않고 오직 내 주님께 순종의 종으로 내어드린다.” 이렇게 진리를 붙잡고 믿음으로 나의 지체를 지켜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열심으로 죄를 억제하는 종교적인 고행이 아닙니다. 이미 은혜 아래로 옮겨진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신하며 매 순간 내 전 존재를 의의 주인 되신 주님께 기꺼이 순종으로 내어드리는 결단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넘치는 선물이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노예 구역으로부터 완벽하게 탈출시켜 생명 안에서 당당하게 다스리는 자로 서게 만드는 하늘의 권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소리에 순종하며 누구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귀의 거짓 속임수와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영광스러운 자녀의 권세를 죄의 노예 자리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죄와 사망의 모든 사슬을 깨뜨리고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도도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내 죄의 소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여러분의 생각과 삶을 오직 하나님께 순종의 종으로 드리십시오. 죄의 지배를 완전히 차단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 안에서 생명으로 왕노릇 하며 당당하고 거룩하게 승리하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 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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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21.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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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정일웅 목사의 ‘한국교회, 미래 목회자가 준비해야 할 10가지 교훈’
-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적 상황은 이전(80~90년대)과 비교하면 그리 희망적이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교회 성도 수가 증가하지 않고 감소한다는 통계에서도 확인되며, 특히 한국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긍정보다는 부정이 앞선다는 소식에서도 드러난다. 벌써 각 신학교의 정원 미달 사태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절감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좁은 소견으로는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이 초래한 사회적 불신 때문으로 여겨진다. 교회가 지나치게 경쟁하며 서로를 불신하던 모습이 고스란히 사회에 비추어져, 이제는 교회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교회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는 분위기다. 현재 문공부에 등록된 개신교 교파 수만 무려 250여 개에 달하며, 미등록 교단까지 합하면 400개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강연자인 저의 청년기였던 지난 70년대의 폭발적인 성장 분위기와는 완연히 다른 현실을 오늘날 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을 전하기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신학생과 미래 한국교회 목회자 여러분, 부디 너무 상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목회적 현실이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이러한 목회와 신학교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는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소망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위기 한가운데서도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시며, 오직 그런 이들에게 새로운 사명의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의 복음 사역에 부름받은 일꾼으로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각자의 소명과 사명을 재확인하며 장래를 신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언제나 동행하시며, 미래 한국교회를 짊어질 귀한 일꾼으로 굳건히 세워주실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미래 한국교회 목회자로서 준비해야 할 10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역의 여정에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첫 번째, 목회자가 되기 전 먼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가?”를 먼저 자문해야 한다. 여러분은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목회자가 되고자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짊어질 목양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학업에 임해야 한다. 그럴 때 신학 공부는 더욱 진지하고 흥미로워지며, 진리의 깨달음과 사명감이 깊어질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목자는 자기 욕망을 다스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짊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결단을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했다. 이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고백에 이르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함을 뜻한다. 바울은 그 앞 구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라고 선언했다. 생명의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헌신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의 본질이며, 미래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기본자세다. 교수님들을 통해 습득하는 신학 지식은 목회적 자질을 기르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며 학점 관리에도 충실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식조차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려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일이다. 지식의 힘만으로는 목양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을 겸손히 내려놓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비로소 영적 사역이 가능해진다. 목양의 본질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깊은 영성에 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경건의 훈련은 신학 지식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따라서 신학생 시절부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이 아니라 은밀한 골방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영성 훈련을 이어가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제시한 3단계 기도 훈련, 즉 ‘오라티오-메디타티오-텐타티오(Oratio-Meditatio-Tentatio)’를 본받기를 권한다. ‘오라티오(Oratio)’는 성경 진리의 바른 이해를 위해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이고, ‘메디타티오(Meditatio)’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이며, ‘텐타티오(Tentatio)’는 묵상한 말씀에 비추어 양심을 성찰하고 거짓된 동기를 점검하며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 속에서 연단하는 과정을 뜻한다. 중세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로욜라(I. Loyola)가 제시한 ‘오라티오-메디타티오-콘템플라티오(Oratio-Meditatio-Contemplatio)’의 구조를 따랐다. 가톨릭은 마지막 단계인 관상(Contemplatio)을 하나님과 합일하여 신비를 체험하는 기도의 절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관상이 사제들을 개인적 신비주의에 빠뜨려 정작 성도를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관상 대신 말씀의 거울 앞에 양심을 비추고 자기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시험과 성찰의 과정인 ‘텐타티오’로 전환한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가 아닌지 돌아보는 자기성찰이 핵심이다. 날마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영성 훈련을 힘쓸 때, 목회자는 성도 앞에 신실한 양심과 성숙한 인격을 드러낼 수 있다. 목회자의 영적 탈선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신학생 시절 방치했던 작은 거짓과 인정받고자 하는 미세한 욕망이 자라나 큰 실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학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적 열정 위에 자기 부정의 영성 훈련을 부단히 병행할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신실한 일꾼으로 서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목양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주님께 위임받은 ‘소명과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한국교회 일각에는 여전히 교인 수, 예배당 크기, 재정 규모, 목회자의 유명세로 성패를 가늠하는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여러분은 이러한 성공제일주의의 굴레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성공은 세상의 잣대일 뿐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아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 그리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귀환을 두고 하늘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지를 일깨워주셨다. 목양의 초점은 다수의 무리를 거느리는 데 있지 않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있다. 외형적인 수치나 규모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미래 목회마저 오늘날처럼 교인 쟁탈과 출혈 경쟁으로 치닫는다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타락한 세상은 경쟁 논리에 지배당하지만,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처입고 지친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초청하지 않으셨는가? 앞으로는 모든 목회자가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소형 교회, 농어촌 교회, 개척 교회, 특수 사역, 병원 및 학원 복음화, 다문화·이주민 공동체, 온라인 사역 등 다양한 형태의 목양이 요구되고 있다. 규모와 상관없이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목회자의 본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중심으로 무장된 일꾼을 찾으신다. 신학생 여러분이 던져야 할 질문은 “얼마나 큰 교회를 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주께서 맡겨주신 양 떼를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며 섬길 것인가?”여야 한다. 목회의 진정한 열매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이 소망을 되찾고,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며, 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매다. 본질에 집중할 때 외형적인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르는 결과일 뿐 결코 목표가 될 수 없다. 스스로 다 돌볼 수 없다면 거대한 성을 쌓아 올릴 것이 아니라, 후배 목회자를 세워 분립 개척을 지원하거나 이웃의 작은 교회들과 성도들을 너그럽게 나누는 상생의 목회가 필요하다. 주님의 양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착각하는 독점 의식을 버려야 한다. 세 번째,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신실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는 목회의 중추적인 사역이다. 부단히 연구하고 훈련하여 바른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를 유창하게 전달하는 능력과 성도를 참되게 목양하는 능력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신학교에서 성경 해석학, 강해설교 작성법, 수사학 등을 충실히 익혀야겠지만, 미래 목회 현장에서는 성도의 아픔을 경청하는 법, 환우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법, 슬픔과 상처를 마주한 자를 위로하는 법, 가정과 세대 간 갈등을 중재하는 법, 실직과 실패로 좌절한 이의 손을 잡아주는 법, 그리고 현학적인 말 대신 함께 울어주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강단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선명하게 선포하되, 삶의 현장에서는 성도들과 깊이 소통하며 눈물을 닦아주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바른말을 선포하는 것만큼이나 언제 입을 열고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목회적 지혜가 절실하다. 네 번째,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미래 목회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경청이다. 다음 세대는 일방적인 지시나 권위주의적 설교보다 진솔한 대화와 쌍방향적 소통, 의견을 존중받는 수평적 관계를 중시한다. 주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생각할 때 수직적 지배 구조는 마땅히 존중과 환대의 수평적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신학생들은 청년 세대의 질문에 성급히 정답만 주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청년들의 솔직한 회의나 의문을 불신앙이나 반항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교회에서 겪은 상처,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로 인한 실망, 취업과 주거 등 미래에 대한 불안, 교회의 정치적 편향에 대한 염증, 신앙적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된 목자는 질문을 차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품어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함께 찾아가도록 돕는 동반자여야 한다. 다섯 번째, 사역은 목사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동역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설교, 심방, 행정, 인사, 재정, 상담 등 모든 영역이 집중되는 구조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이러한 구조는 목회자를 탈진으로 몰아가고 성도들을 피동적인 관람객으로 전락시킨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은 목회자의 역할을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정의한다. 목회자가 모든 사역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말씀으로 훈련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세워가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의 본질적 소명이다.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직자와 평신도를 이원화하고 계급화하는 과오를 범해 왔다. 이러한 체질은 철저히 개혁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영적 질서를 이끄는 공적 지도자임은 분명하지만, 루터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로 역설했듯 모든 신자는 가정과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평신도들이 각자의 처소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주역으로 설 수 있도록 세워주어야 한다. 따라서 권한을 나누는 법, 평신도를 신뢰하고 동역자로 훈련하는 법, 교회를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법, 여성과 청년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 갈등을 지혜롭게 중재하는 포용력을 신학생 시절부터 체득해야 한다. 여섯 번째, 신학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함께 길러야 한다. 목회자는 인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 상담학, 사회학, 교육학, 사회복지학 등의 지혜를 섭렵해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현실적 고통을 바르게 헤아리지 못하면 영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우울증 환자에게 단순히 “기도가 부족하다”고 핀잔을 주거나, 발달장애를 신앙의 결함으로 치부하거나,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무조건적인 인내와 순종만을 강요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영적 돌봄과 전문적 치료의 영역을 올바르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영적 문제는 말씀과 기도로 목양하되, 정신의학적 문제는 전문의와 상담 기관으로 신속히 연계하고, 폭력 피해는 안전 확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며, 법률·재정 문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주선해야 한다. 전문 기관에 연계하는 것은 목양의 실패가 아니라 성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책임 있는 목회적 배려다. 일곱 번째, 인공지능(AI)과 미디어 기술을 지혜롭게 활용하되 결코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 목회 현장에서 AI 기술, 온라인 미디어, 영상 플랫폼을 외면하고 사역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수많은 목회자가 자료 조사와 원고 정리에 AI를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은 유용한 도구일 뿐 결코 사역의 주체가 될 수 없다. AI는 성경 연구의 보조 자료나 행정 서식을 만드는 도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의 영혼을 만지거나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신학생 시절부터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씨름하는 말씀 묵상과 골방의 기도, 성도의 아픔을 끌어안는 목회적 현존, 공동체의 상처를 짊어지는 책임감이 선행되어야 한다. AI가 정형화된 설교문을 작성해 줄 수는 있어도, 목회자 자신의 영혼이 깨어지고 성령의 감화로 잉태된 생명의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기술의 활용에는 능통하되, 목회의 본질은 오직 말씀과 기도, 성령의 임재에 있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여덟 번째, 재정 집행과 이성 관계, 권한 사용에 있어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추어야 한다. 미래의 성도들은 목사라는 직분 자체만으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20%를 밑도는 참담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목회자는 직권에 기대기보다 투명한 삶과 성숙한 인격으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목회 윤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명이다. 특히 재정과 이성, 권력의 유혹 앞에 철저한 자기 통제가 요구된다. 교회 재정 운영에 목회자 개인이 직접 관여하는 구조는 단호히 지양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구제와 재정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이 재정 관리를 전적으로 7명의 집사에게 위임하고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라”(행 6:4)고 선언했다. 이 원리가 오늘날에도 회복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물질의 시험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목회적 거룩성을 지킬 수 있다. 또한 지위를 이용해 성도들의 건전한 문제 제기를 억압하거나 맹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회법과 실정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잘못이 있을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책임지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마가복음 10장 43~45절의 교훈처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아홉 번째, 정파적 이념에 편향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남남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헌법 제20조가 명시한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치 권력과 야합하지 않고 복음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가치다. 목회자는 특정 정당이나 이념의 대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궁극적 지향점은 지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의 의에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강요하거나 적대적 언어로 강단을 채우는 행태는 복음의 문을 가로막을 뿐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복음의 렌즈로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국가의 정책이 생명을 존중하는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지,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지 복음적 가치관에 입각해 성찰하도록 가르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중보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열 번째, 목회자 자신을 돌보는 균형 잡힌 자기 관리가 필수적이다. 신학생들은 종종 목회자를 지치지 않는 영적 초인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목회자 역시 외로움과 탈진, 깊은 회의를 마주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따라서 신학생 시절부터 정기적인 쉼과 영적 리듬을 지키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말씀 묵상과 독서 생활을 균형 있게 유지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신앙의 동역자와 멘토를 곁에 두어야 하며, 한계에 부딪힐 때는 전문가의 상담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과 사역의 균형을 지키며 배우자와 자녀를 사역의 도구로 희생시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도한 채무를 피하는 건전한 재정 관리와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돌보지 못하는 목회자는 성도를 건강하게 목양할 수 없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며, 오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필수적인 청지기적 책임이다. 사랑하는 신학생과 미래 목회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7장 10절의 말씀을 권면으로 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님의 일꾼은 모든 사역을 마친 뒤에도 자신의 공로나 대가를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서야 한다. 장차 여러분이 한국교회와 강단에서 크게 쓰임받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는 무익한 종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진솔한 고백을 삶으로 실천하는 목자가 되기를 바란다. 사역의 수고에 대한 진정한 보상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장차 주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다(마 25:14-30).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실 앞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엄습할 때마다 마태복음 6장의 약속을 붙들기 바란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을 결코 굶주리게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고 위기에 처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 약속을 믿지 못하고 세속적 물질주의와 사리사욕에 굴복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학도 여러분, “나는 무익한 종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다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소명의식을 끝까지 붙들기를 바란다. 어떠한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여러분을 통해 한국교회가 다시금 회복과 부흥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을 굳게 믿는다. 참된 제자로 온전히 준비되어 미래 한국교회를 밝히는 신실한 목회자들이 다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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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정일웅 목사의 ‘한국교회, 미래 목회자가 준비해야 할 10가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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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20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 6:14)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12절과 13절을 통해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우리 자신과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드려야 한다는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과 정체성이 바뀐 자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영적 싸움의 태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로마서 6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이자, 우리가 죄를 이기고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명확한 법적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여기서 “주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죄가 우리에 대해 더 이상 법적인 소유권이나 지배권,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연약함과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며 가짜 지배권을 휘두르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못을 박습니다. 죄는 결코 너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지배권 박탈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통치 영역과 법적 테두리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에게 정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지만, 결정적으로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존재 자체가 부패해 버린 우리에게 끊임없이 정죄와 사망 선고를 내릴 뿐입니다. 율법 아래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죄의 고발과 사탄의 참소 앞에서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죄의 종노릇을 면할 수 없습니다. 지키려고 애쓸수록 내 안의 망가진 본성만 드러나 절망하게 되는 구조가 바로 법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더 이상 그 법 아래 있지 않다. 너희는 이제 은혜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통치 구조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보다 훨씬 더 크고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영역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지어도 무조건 봐주신다는 방종의 의미가 아닙니다. 은혜는 아담의 모든 실패와 내 안의 시커먼 죄성을 보혈로 완벽하게 덮어버릴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내 안에 생명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제적인 영적 능력을 공급해 주는 강력한 권능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유혹을 받고 넘어지며 정죄감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통치 영역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은혜 아래 있다는 이 위대한 법적 진리를 명확히 알고 믿음으로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옛 법 조문을 들고 찾아와 교묘하게 우리를 속입니다. “봐라, 너 또 실패했지. 너는 여전히 이 율법의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다”라며 가짜 청구서를 들이댑니다. 이때 내 감정이나 행위를 바라보면 속아 넘어가 법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사탄이 옛 법을 들이밀 때 은혜의 통치를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법 아래 있지 않다. 내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는 이제 은혜 아래 있는 자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압도하여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 죄는 나에게 왕 노릇 할 법적인 권리가 없다.” 이렇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으로 권세를 주장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결단과 종교심으로 죄와 싸워 이겨보려는 눈물겨운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은혜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 놓으신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을 믿음으로 취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맡기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넘치는 선물이며, 우리를 죄의 묶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생명 안에서 당당하게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다스리는 법은 무엇입니까? 마귀의 거짓 고발과 정죄에 사로잡혀 다시 무덤 속 옛 율법의 족쇄에 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부활 생명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내 행위가 아닌 십자가의 진리를 진짜 사실로 계산하고 선포하십시오. 죄의 지배를 단호히 차단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 안에서 생명으로 왕 노릇하며, 당당하고 거룩하게 승리하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 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 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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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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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독립교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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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20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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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거짓말의 결과’(계 21:8)
-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요일 2:21)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을 일절 금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과 지옥에서 영원히 벌 받을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인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 숭배자, 거짓말하는 자들로 구분되었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의 영적인 죄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죄악도 징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리고 이단 사상을 퍼뜨린 자들을 포함합니다. 둘째 사망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가 당할 심판입니다. 거짓은 마귀로부터 나오는 행위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살인자이며,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케 해왔습니다. 마귀가 아담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써 결국 사람은 사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창 3:1-6) 마귀는 항상 악한 본성을 따라 말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만일 어떤 사람의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그 위증인은 피고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재판관들은 자세히 조사한 뒤에, 그 증인이 그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 증인이 그 이웃을 해치려고 마음 먹었던 대로 그 이웃에게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들 가운데서 그런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신 19:18-19)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재판석상에서 거짓 증언 때문에 무죄한 사람이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성읍에 살고 있는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나봇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왕상 21:10)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울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아멜렉이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진멸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멜렉 왕 아각은 사로잡았고 양 떼와 소 떼 중 가장 좋은 것은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한 것이지요. 사울은 사무엘에게 주님의 명령대로 다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함께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따로 떼어놓고 난 나머지를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놓고 전부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당신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놓았느냐고 책망하면서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서 삽비라가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판 땅값이 이것뿐인지 묻자 그것뿐이라고 삽비라도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영을 왜 시험하려고 하였느냐고 말하자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값 전부를 드려야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교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드리기는 아까우면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자기 소유를 남긴 것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과 교회를 속인 일 때문에 심판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말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미혹당하여 거짓말하지 않도록 항상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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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거짓말의 결과’(계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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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9.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롬 6:12-13)
-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10절과 11절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 계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재의 상태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영적 사실을 내 삶의 장부에 그대로 계산해 넣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은 이 ‘여기는 믿음’을 기초로 이제 우리의 삶과 육신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스리고 영적 싸움을 싸워나가야 하는지 실제적인 명령과 지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포문을 엽니다.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이 이미 바뀌었으니 이제는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라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바울이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은 12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여기서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거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은 여전히 죄의 유혹에 취약한 죽을 몸입니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지만 오랜 노예 생활의 습관과 육신의 정욕인 몸의 사욕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옛 주인의 목소리처럼 명령하며 유혹합니다. 사탄은 이 죽을 몸의 사욕을 자극하여 마치 자기가 여전히 우리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려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몸의 사욕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죄의 통치 구역에서 벗어난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옛 주인이 아무리 밖에서 소리를 지르고 명령을 내려도 법적 권세가 없는 가짜 명령이기에 우리는 그 소리에 복종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이어서 13절은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무기”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지체’는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과 같은 신체 부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시간과 물질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뜻합니다. 그리고 ‘무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호플론’이라고 하여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군사의 병기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지체는 중립 지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군대를 위한 불의의 병기가 되든지, 하나님의 군대를 위한 의의 병기가 되든지 둘 중 하나의 전쟁에 반드시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우리의 입술과 손발을 부추겨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도록 유혹합니다. 우리의 상처와 정욕을 자극하여 미움과 음란과 탐욕의 병기로 쓰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해야 할 적극적인 행동은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 새 생명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제는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사랑의 병기로, 찬양의 병기로, 복음의 병기로 하나님께 기꺼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내 입술을 불평의 무기가 아닌 감사의 무기로 드리고, 내 손과 발을 죄악의 자리가 아닌 섬김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무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죄를 안 지으려고 내 힘으로 버티는 소극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법적 승리를 선포하며 나의 전 존재와 지체를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드려 의의 무기로 쓰임 받게 하는 거룩한 권세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이며,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권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체는 누구의 무기로 쓰임 받고 있습니까? 마귀의 속임수와 육신의 정욕에 속아 여러분의 귀한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몸의 사욕을 단호히 거부하고 여러분의 생각과 눈과 입술과 손발을 오직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십시오. 죄의 지배를 차단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당당하고 거룩하게 승리하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 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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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9.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롬 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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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8.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0-11)
- 오늘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6장 10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8절과 9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사망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린 영원한 법적 승리라는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연합된 우리 역시 사망의 지배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은 이 위대한 연합의 정점을 보여주는 말씀이자,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반드시 작동시켜야 할 강력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먼저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선포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여기서 '단번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파팍스'라고 하여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하며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는 완벽한 성취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값을 청산하기에 완전히 충분했습니다. 죄가 가진 통치 권세와 정죄의 힘을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전히 끝내버리신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살아 계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하고 친밀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이고 영적인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11절에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죽으려고 애쓰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법적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단어는 계산하다, 장부에 기입하다라는 뜻을 가진 법정 및 회계 용어입니다. 감정이나 느낌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미 확정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 삶의 진실로 장부에 못 박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실제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죄의 유혹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넘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여기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다가와 거짓 장부를 들이댑니다. "봐라, 네 꼴을 봐라. 너는 여전히 상처에 매여 있고 죄의 노예가 아니냐"라며 가짜 영수증을 청구합니다. 이때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바라보며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나 봐"라고 받아들이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통제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탄이 거짓 장부를 밀어낼 때 그리스도의 피로 확정된 진리의 장부를 펼쳐야 합니다. "아니다. 진리의 장부에는 내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죄는 나에게 청구할 권리가 없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영원한 부활 생명으로 살아 있는 자다." 이렇게 믿음으로 계산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열심과 도덕으로 죄를 이겨보려는 종교적 결단이 아닙니다. 이미 2천 년 전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법적 승리를 내 삶에 그대로 대입하여 굳게 선포하는 권세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이며, 우리를 죄의 통치 구조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의의 자녀로 당당히 서게 만드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장부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귀가 정죄하는 옛 자아는 이미 지워졌고 끝이 났습니다. 스스로를 여전히 무기력한 죄인으로 규정하며 마귀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내 감정과 형편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진짜 사실로 계산하고 여기십시오. 죄의 소리를 당당히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생명 안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 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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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한 사람만 응답’(눅 17:11-19)
- 하나님 나라의 관심은 은혜를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랜 시간 믿어 온 것에 만족하며 사는지, 날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신앙경력이나 교회 직분이나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에 감사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유대인의 중심 생활권이었고,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어 온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공동체 밖에서 살아야 했고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레 13:1-46) 그들 중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명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너희를 고친 것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고 동일하게 치유받았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후 아홉 사람은 계속 제사장을 향해 나아갔고, 한 사람은 발길을 돌려 다시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단지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고 예수께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돌아가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라고 물어보신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열 사람은 모두 건강을 회복했지만,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만 구원 선언을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병이 나은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지만,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열 사람이 모두 치유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치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만 구원 선언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적을 경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응답하는 사람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믿음”(19절)은 단순히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치유를 경험한 후 다시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기적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예수께 자신을 맡기는 신실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런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응답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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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한 사람만 응답’(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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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9)
- 오늘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6장 8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6절과 7절을 통해서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결과 죄의 몸이 무력화되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법적인 자유인이 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죽음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영광스러운 생명의 연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영적인 필연성과 그 근거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만일'이라는 단어는 의심이나 불확실한 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면 예외 없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부활의 새 생명으로 함께 살아나게 된다는 영적인 공식이자 확고한 보증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덤에서 끝나는 절망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탄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는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신념이나 긍정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영적인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 그 확실한 근거가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을 때 사망의 권세는 영원히 종식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법적인 권리나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생이 아니라, 온 인류를 짓누르던 사망 권세 자체를 밟아 버리고 완벽하게 정복하신 승리입니다. 이 진리가 왜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역시 그분이 얻으신 승리를 고스란히 분배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전 아담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던 노예였습니다. 사탄이 흔드는 상처와 정욕과 두려움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 생명으로 연합된 지금,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법적인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영적 무기력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 어마어마한 부활의 진리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짜 지배권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거짓말을 합니다. "너는 여전히 내 지배 아래 있고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며 두려움의 덫을 놓습니다. 이때 우리의 환경이나 감정을 바라보면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라보고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다. 사망 권세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앞에 깨어졌다. 사망은 더 이상 나를 주장할 수 없으며 나는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다스리는 자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힘과 내 의지로 죄와 사망을 이겨보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으신 완벽한 승리의 법적 근거를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선포하는 권세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나의 연약함보다 크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이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통치 구조로부터 완전히 탈출시켜 의의 자녀로 서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망 권세 아래 묶여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옛사람은 이미 장사되었고 여러분 안에는 다시 죽지 아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귀의 거짓 정죄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시 무덤 속 옛사람의 옷을 뒤적이지 마십시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그 넘치는 은혜를 공급받아 죄와 사망의 소리를 당당히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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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