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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영원한 속죄’(히 9:11~14)
-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사람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피를 쏟는 희생을 치르시고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신 것이기에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래 좋은 일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구원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피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내어주는 것으로서 속죄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으로 단 한 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래서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암송아지의 재는 정결예식을 말합니다.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민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결은 외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단순히 죄만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는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첫째, 예수의 보혈은 속죄하게 합니다. 속량은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예수께서는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수의 보혈은 정결하게 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예수의 보혈은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예수의 보혈은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켰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찬송가 268장 1절)라고 날마다 찬송하며 영원한 속죄를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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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영원한 속죄’(히 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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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의 말씀을 받아 누림’(마 16:13~28)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3-16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겉으로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묻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더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시는 질문입니다. 신앙은 결국, 내가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고백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지금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고백이며 표지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의 신실성을 금방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이시며 구원의 왕이시라고 인정하는 진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실 때 시작됩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면서 말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신앙이 사람의 계산과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기대에 붙잡히게 되면, 예수님께서 인도하실 진정한 길을 가로막을 수 있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은 우리 삶의 목표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만 살지 않으며 귀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세상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리고 완고한 마음과 고집이 주인처럼 되는 자리를 내려놓고, 더 이상 내가 아닌 예수님께서 내 인생 자리의 주인이 되시도록 순종하는 일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사랑의 관계로 인해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나 손해, 인내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함께 짊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도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만, 고백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고백대로 주의 말씀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그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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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의 말씀을 받아 누림’(마 1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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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임승안 박사의 ‘한(恨) 많은 백성이여, 원칙(原則)으로 돌아가자’
- 2026년의 입춘이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춥다. 한(恨)으로 응어리진 국민들의 마음이 좀처럼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조선 백성의 반(半) 이상이 자손 대대로 노비로 살아야 했던 설움의 역사, 중국에 잡혀간 ‘환향년’, 일제강점기의 ‘위안부’와 ‘학도병’,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들의 가슴은 한(恨)으로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해방 이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의 등장, 좌우 분열과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 두 정부의 수립과 처참했던 6·25 전쟁. 한반도 역사에 지우고픈 천추(千秋)의 한(恨)이 또다시 새겨진 시기였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숱한 도발과 테러,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직접 위협한 미사일 발사, 전 세계의 만류에도 끝내 손에 넣은 핵무기는 한반도의 평화가 아직 요원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우려 속에서 그들의 약속을 신뢰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번번이 쓰디쓴 배신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부는 어떠한가. OECD 가입이라는 성과 이면에 가려진 현실은 결코 밝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비롯해 높은 이혼율과 낮은 출산율, 낙태 문제 등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었던 민낯이었다.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 또한 순탄치 않았다. 하야와 망명, 영부인 살해와 대통령 측근 암살, 수사 중 자살, 탄핵 수감, 뇌물 혐의 수감, 계엄령 선포와 사형 구형에 이르기까지, 한(恨)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정치 현실 역시 암울하기 그지없다. 지난 수년간 국민적 논란이 컸던 부정선거 의혹은 여전히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가칭) 교회재산몰수법, 낙태법 등 이른바 ‘3대 악법’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소수의 인권을 내세워 다수의 권리를 짓밟는 상식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 진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절규는 또 하나의 한(恨)으로 쌓여가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중대 사건과 관련한 일부 검사의 기소와 구형, 영장 전담 판사의 영장실질심사 결정, 재판부의 최종 판결이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위직 후보자들에 대한 검증 부재와 반복되는 임명 강행 역시 우려를 낳는다. 제어 장치 없이 질주하는 기차와 같은 모습은 아닌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깊어진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억울한 한(恨)으로 절규하는 이들이 그 한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해답은 원칙(原則)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공의(公義)와 자비(慈悲), 정직과 상식의 원칙이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이라는 헌정 질서의 원칙이다. 미래 지도자를 바르게 양육하고 현재의 지도자를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선출하는 원칙이다. 스스로 사고하며 행동하여 선동하지도, 선동당하지도 않겠다는 결단의 원칙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무엇보다 대통령이 가정의 부모, 학교의 교사, 사회의 시민과 함께 이러한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시민과 함께 이러한 원칙을 지키되, 심각하게 불의한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책임 있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나라와 백성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다. 특히 다음의 영적 원칙을 되새겨야 한다. 첫째, 예수께 항상 돌아가야 한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찬송가)라는 고백처럼,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갈 2:20)의 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직 예수만이 한(恨)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끊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마귀가 준 저주와 사망의 한에서 인류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이루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역사하신다. 이미 죗값을 치르셨기에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죄책감과 한의 올무로 붙들 수 없다. 셋째,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 한의 올무에 걸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마 4:1-11)은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①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유혹 ②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라는 유혹 ③ 권력과 재력과 명예를 위해 타협하라는 유혹 이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마귀는 결국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존재다(요 10:10). 넷째, 예수께서 말씀으로 대응하셨을 때 마귀는 물러갔다. 말씀만이 승리의 무기다. 다섯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마 4:19-25). 영적 전쟁의 승리자이신 예수께 나아갈 때, 환경이 어렵더라도 한이 우리의 심령을 지배할 수 없다. 만일 이 땅에 여전히 한이 가득하다면,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 또한 돌아보아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마귀의 저주와 한에 눌린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품자.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생명을 살리자. 한국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지도자들이 예수께 돌아오도록, 우리부터 기도와 예배와 선행에 더욱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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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임승안 박사의 ‘한(恨) 많은 백성이여, 원칙(原則)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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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시 16:8-11)
- 사람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레 20:8) 다윗은 항상 주님을 앞에 모시고 신뢰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도록다윗은 ‘내 입술을 지키소서, 마음을 지켜주소서, 귀를 지키소서’(시 141:3-5)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갑니까? 본문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게 하며, 육체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스올의 문턱에서라도 생명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 수 있는지 다윗에게 배우려고 합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여쭙는 삶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한 것을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주님께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을 쳐도 되겠습니까”(2절) 하고 여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해 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유다에서도 가슴 졸이며 살고 있는데,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군대와 마주치면 더 위험하다며 반대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너의 손에 넘겨주겠으니 어서 그일라로 가라고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무찔렀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앞서 가시면서 싸워주셨기 때문이며, 다윗이 주님께 계속 여쭈어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주님께 모든 일을 여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가시면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신 1:30-31)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께 계속 여쭙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다윗은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서 먼저 블레셋에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직접 만든 모든 악기를 총동원하여 찬양하면서 옮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백성과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하나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며 찬양하였습니다.(삼하 6장)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오직 이스라엘의 왕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놀라운 행적을 항상 전파하겠다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계 4:11) 셋째, 다윗은 회개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죄를 지적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를 책임졌습니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은 기쁨과 함께 죄로 인한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관심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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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시 1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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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박준형 목사의 ‘당면한 현실’(마 13: 18~30)
-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7-29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모습들과 현실 속에서 발생되고 엮어진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같은 씨앗, 천국의 말씀이 뿌려지지만, 마음의 밭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자에게 빼앗기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자라날 틈을 얻지 못합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쉽게 넘어집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마음을 가득 채워 말씀이 막히게 됩니다. 결국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해로만 끝나지 않고 삶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견딥니다. 그래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실은, 말씀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마음이 준비되고 지켜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라지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갑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함께 보입니다. 종들이 당황해서 묻습니다. “주여, 좋은 씨를 뿌리셨는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했다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종들은 즉시 가서 뽑아 버리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그리고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는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묶고, 곡식은 곳간에 모으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과 현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비록 좋은 씨가 뿌려진 밭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는 원치않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이 섞여 있다고 해서 선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루는 방식에서 조급해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당장 눈에 보이는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싶지만, 깨달음 없는 성급한 처사는 오히려 그 곡식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혼란과 처참함에 대한 즉결보다는 곡식을 살리는 보호하심과 인내를 말씀하셨습니다. 최종적인 분별과 심판은 추수 때,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먼저, 말씀을 들을 때 깨닫는 마음이 되라고 하십니다. 얕은 기쁨으로 끝내지 말고, 뿌리를 내려 환난 속에서도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염려와 유혹이 마음을 덮지 않도록 경계하며, 말씀이 숨 쉬고 자랄 공간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공동체와 삶의 자리에서 선과 악, 진짜와 가짜가 섞여 보이는 상황을 만날 때 조급한 판단과 성급한 배제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따라, 당면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밭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시고, 혼란하고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지혜와 인내를 갖추어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과 결단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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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박준형 목사의 ‘당면한 현실’(마 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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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오병이어’(마 14:13-21)
-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b)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히 6:18)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요 6:14)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따라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여기는 빈 들이고 날이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사서 먹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기 가지고 있는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보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무리에게 나누어주니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은 양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의 창조 능력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인 것을 알려주었습니다.(출 16:15) 만나가 그때 일시적인 양식이었던 것에 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떡은 영원한 양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게 해주시는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엘리사가 행한 이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와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셔서 충분히 먹고 남도록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20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게 한 이적이 나옵니다. 두 가지 이적의 공통점은 먹고도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한 번 체험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님의 새롭고 풍성하신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여 그 은혜를 이웃과 꾸준히 나누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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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오병이어’(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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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비밀’ (마 5: 7~12)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7-10절) 긍휼은 자비로움으로 해석되며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심 이상의 것입니다. 상대의 처지를 내 일처럼 여기고, 가능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판단만으로 끝내지 않고, 상대방의 회복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긍휼입니다.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흘려보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사이에서도 긍휼의 통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긍휼의 마음이 어떤 때에 작동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그밖에 불우한 경우에 주로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거나 관련된 사역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긍휼은 시작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이웃과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 판단이 앞서기보다는 어떻게 도울까를 먼저 묻는 자세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긍휼에는 언어적인 습관이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인내가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우월감이 앞서는 경우는 진정한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의 청결은 비단 깨끗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나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위선과 이중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누리며 분별하는 안목이 열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일상 사이의 이중적인 생활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즉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지는 말과 자신의 실제 행동이 불일치되는 것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욕심에서 비롯되는 숨기는 습관을 끊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결단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이와 함께 자기의 마음을 더럽히는 탐욕과 중독의 습관으로부터 역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서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단순히 갈등이나 위험을 회피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직면하되 사랑으로 평화롭게 연결하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곧 아름다운 관계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인 분이시며 성도 역시 화평케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나타나는 표지가 화평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결단과 패기가 모두 있어야 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경우는 성격이나 감정으로 인해 생긴 충돌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다가 생기는 대가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택으로 인해 억울한 말이나 오해, 배척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함조차도 하나님께 맡기고 전진하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긍휼과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일, 그리고 의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일은, 본인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려있어야 하고 그 사랑의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에 주시는 커다란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복을 잘 지키고 따르며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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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비밀’ (마 5: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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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손현보 목사님 석방에 대하여’
- 이번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께서 한동안 옥고를 치르시고 석방되신 데 대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진리 수호를 위해 고난을 감내하신 손 목사님의 노고에 대하여 깊은 위로와 격려를 드립니다. 손 목사님께서 겪으신 고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일부였으며, 손 목사님은 기독교를 대표하여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되셨던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진리를 위해서는 거짓과 타협할 줄 몰랐고, 불의에 맞서서는 생명을 걸고 싸우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저항의 정신을 가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삶의 자세입니다. 구약성경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굉장히 컸습니다. 이 신상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모든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의 모든 관원을 소집하여,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이 그 거대한 금 신상 앞에 서 있을 때, 선포하는 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이 막강한 위력 앞에 이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풍악이 울릴 때, 거기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막강한 권력 앞에 저항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항하면 곧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권력 앞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절할 때, 유일한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갈대아 사람들이 즉시 그들을 왕에게 고소했고,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대노했습니다. 왕은 그들을 불러 문책했습니다.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준비하였다가 풍악이 울릴 때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이때 그들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줄을 아옵소서.“ 참으로 놀라운 정신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정신을 가진 믿음의 선조들이 과거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순교했습니다. 그 순교의 피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현장에 함께하셨고, 결국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이번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과 석방 또한 이 진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손 목사님께서 석방 직후 금요기도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우리와 싸우는 자와 친히 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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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손현보 목사님 석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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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마음’(눅 15:7)
-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찾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도록 오래 기다려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롬 5:12)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끝을 아시기에 오늘도 애타게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우리를 아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을 떠난 자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8-9)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다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야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할 때 나를 찾아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도록 오래 기다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 잃고 헤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 방법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첫째, 강권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는 바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울타리 밖에 있는 자를 끌어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전도자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 물으실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주님께서 찾으실 때 “나를 보내소서”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도록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전도이고, 전도가 삶이어서 우리를 통해 많은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전도를 넘어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천히 변화하더라도 오래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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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마음’(눅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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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벙어리 개 같은 교회'
-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는 그 당시 파수꾼들의 사명을 보고 느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사야 56장 10-12절) 아주 정확하고 예리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의 종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양 무리를 맹수들로부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 (에스겔 3장 17-18절)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이 얼마나 중한지, 그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사회의 양심이요 나침반입니다. 그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경고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도둑이 침입할 때에는 짖는 개가 되어야 합니다. 짖어야 할 때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짖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둑을 따라다니며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면 더욱 안 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부정부패, 악법, 탈법, 비법이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파수꾼의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교회와 목사들은 어찌하고 계십니까? 지도자들이 탐욕에 쌓여 있고 분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 독주에 취하여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세상 독주에 취하여 벙어리 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2001년 데이얀 엉(Dayyán Eng) 감독이 연출한 단편 영화 '버스 44'가 생각납니다. 사회의 무관심과 방조가 낳은 비극적인 결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 여성 버스 기사가 버스를 운행하며 산길을 넘고 있었습니다. 강도 두 명이 승객들의 금품을 빼앗고 기사에게 달려들어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못 본 체하고 있었는데, 오직 한 청년만이 그들의 만행을 말리다가 칼에 다리를 찔리고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강도들은 버스를 세우고 여성 기사를 숲으로 끌고 가서 몹쓸 짓을 한 후 한참 뒤에 돌아왔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성 기사는 조금 전 강도들을 제지했던 청년에게만 다짜고짜 차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청년이 당황해하며 "방금 내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여성 기사는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 내릴 때까지 출발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청년이 내리지 않고 버티자, 오히려 다른 승객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 내리고 짐도 던져 버렸습니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기사는 커브 길에서 속도를 높여 그대로 낭떠러지로 추락했습니다. 전원 사망이었습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은 버스가 추락하여 승객이 모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멀리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44번 버스였습니다. 여성 운전기사는 살만한 가치가 있었던, 유일하게 악행을 제지했던 그 청년만은 일부러 내리게 하여 살려두고, 모른 척 외면했던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건은 비록 소수의 악인뿐만 아니라, 침묵하고 방관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목자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 사회의 악을 보고도 짖지 못하고 침묵하는 목자는 결국 그 피 값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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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벙어리 개 같은 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