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16(일)
  • 전체메뉴보기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8.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0-11)
    오늘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6장 10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8절과 9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사망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린 영원한 법적 승리라는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연합된 우리 역시 사망의 지배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은 이 위대한 연합의 정점을 보여주는 말씀이자,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반드시 작동시켜야 할 강력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먼저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선포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여기서 '단번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파팍스'라고 하여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하며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는 완벽한 성취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값을 청산하기에 완전히 충분했습니다. 죄가 가진 통치 권세와 정죄의 힘을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전히 끝내버리신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살아 계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하고 친밀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이고 영적인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11절에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죽으려고 애쓰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법적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단어는 계산하다, 장부에 기입하다라는 뜻을 가진 법정 및 회계 용어입니다. 감정이나 느낌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미 확정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 삶의 진실로 장부에 못 박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실제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죄의 유혹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넘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여기는 믿음'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다가와 거짓 장부를 들이댑니다. "봐라, 네 꼴을 봐라. 너는 여전히 상처에 매여 있고 죄의 노예가 아니냐"라며 가짜 영수증을 청구합니다. 이때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바라보며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나 봐"라고 받아들이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통제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탄이 거짓 장부를 밀어낼 때 그리스도의 피로 확정된 진리의 장부를 펼쳐야 합니다. "아니다. 진리의 장부에는 내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죄는 나에게 청구할 권리가 없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영원한 부활 생명으로 살아 있는 자다." 이렇게 믿음으로 계산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열심과 도덕으로 죄를 이겨보려는 종교적 결단이 아닙니다. 이미 2천 년 전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법적 승리를 내 삶에 그대로 대입하여 굳게 선포하는 권세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이며, 우리를 죄의 통치 구조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의의 자녀로 당당히 서게 만드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장부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귀가 정죄하는 옛 자아는 이미 지워졌고 끝이 났습니다. 스스로를 여전히 무기력한 죄인으로 규정하며 마귀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내 감정과 형편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진짜 사실로 계산하고 여기십시오. 죄의 소리를 당당히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생명 안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 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8-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한 사람만 응답’(눅 17:11-19)
    하나님 나라의 관심은 은혜를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랜 시간 믿어 온 것에 만족하며 사는지, 날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신앙경력이나 교회 직분이나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에 감사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유대인의 중심 생활권이었고,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어 온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공동체 밖에서 살아야 했고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레 13:1-46) 그들 중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명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너희를 고친 것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고 동일하게 치유받았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후 아홉 사람은 계속 제사장을 향해 나아갔고, 한 사람은 발길을 돌려 다시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단지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고 예수께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돌아가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라고 물어보신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열 사람은 모두 건강을 회복했지만,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만 구원 선언을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병이 나은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지만,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열 사람이 모두 치유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치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만 구원 선언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적을 경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응답하는 사람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믿음”(19절)은 단순히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치유를 경험한 후 다시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기적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예수께 자신을 맡기는 신실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런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응답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8-11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9)
    오늘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6장 8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아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6장 6절과 7절을 통해서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결과 죄의 몸이 무력화되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법적인 자유인이 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죽음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영광스러운 생명의 연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영적인 필연성과 그 근거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만일'이라는 단어는 의심이나 불확실한 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면 예외 없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부활의 새 생명으로 함께 살아나게 된다는 영적인 공식이자 확고한 보증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덤에서 끝나는 절망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탄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는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신념이나 긍정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영적인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 그 확실한 근거가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을 때 사망의 권세는 영원히 종식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법적인 권리나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생이 아니라, 온 인류를 짓누르던 사망 권세 자체를 밟아 버리고 완벽하게 정복하신 승리입니다. 이 진리가 왜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역시 그분이 얻으신 승리를 고스란히 분배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전 아담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던 노예였습니다. 사탄이 흔드는 상처와 정욕과 두려움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 생명으로 연합된 지금,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법적인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영적 무기력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 어마어마한 부활의 진리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짜 지배권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거짓말을 합니다. "너는 여전히 내 지배 아래 있고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며 두려움의 덫을 놓습니다. 이때 우리의 환경이나 감정을 바라보면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라보고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다. 사망 권세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앞에 깨어졌다. 사망은 더 이상 나를 주장할 수 없으며 나는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다스리는 자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내 힘과 내 의지로 죄와 사망을 이겨보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으신 완벽한 승리의 법적 근거를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선포하는 권세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나의 연약함보다 크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이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통치 구조로부터 완전히 탈출시켜 의의 자녀로 서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망 권세 아래 묶여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옛사람은 이미 장사되었고 여러분 안에는 다시 죽지 아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부활 생명과 성령의 바람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귀의 거짓 정죄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시 무덤 속 옛사람의 옷을 뒤적이지 마십시오. 이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그 넘치는 은혜를 공급받아 죄와 사망의 소리를 당당히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8-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 13~21)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9절) 빈들에서의 집회를 마치고 몰려온 수많은 백성들의 식사 문제를 생각하던 제자들이 고민 끝에 예수님께 자신들의 의견을 냈습니다. 즉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들이라는 점과, 날이 이미 어두컴컴해진 점,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 저들을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사먹도록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또한 예수님은 그들이 마주 대한 현실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축사를 하십니다. “축사하시고”는, 헬라어로 εὐλόγησεν(eulogēsen, 율로게센)인데, 이는 εὖ(eu, 좋게, 잘)와 λέγω(legō, 말하다)의 두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따라서 “축사하시고”의 본래 뜻은 “좋게 말하다, 찬양하다, 복을 빌다, 축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찬송과 감사를 드리며 축복의 말씀을 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로 시작된 기적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인데, 그러한 예수님의 동작을 표현하면,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좋은 말을 올려드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어느 도시에 갔더니, 도시 한복판 고층 건물 위에 “남의 말 좋게 하자”라는 커다란 간판을 달아서 그곳을 지나는 모든 차량의 운전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역적 차원에서 경각심을 울리는 말이기도 한데, 동시에 그 표어를 고층 전광판이 위치한 곳에 게시하기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예측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좋은 말, 감사의 말은 모두에게 전해야 되지만, 특히 하나님께 올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의 인도자에게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국은 그 유명한 고부갈등이 존재하는 특별한 민족입니다. 한국에서 상당수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바리바리 보내준 음식들을 감사하며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거나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3년, 5년 묵혔다가 자연스레 쓰레기통에 넣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살아보면 그러한 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서로 관계도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3년씩, 5년씩 음식을 썩혀 버리는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되자, 시어머니가 싸주던 것을 버리던 자신이 어느덧 머리가 하얀 시어머니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늙은 부모를 야산에 버리는 소위 고려장을 치루고 하산하려는데, 같이 올라온 자식이 자기도 나중에 부모 버릴 준비를 위해 지게를 챙겨가는 상황과 매우 닮은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의 현실이며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이뤄질 리 만무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보다는 오히려 반복되는 가문의 병폐가 계속 풀리지 않고 있게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변화와 회복과 기적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 사건 이전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 준비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우리 곁에 두신 자들은, 각종 출세한 유명 인물들이기보다는, 주로 가난하고, 헐벗고, 공과금을 제때 못 내고, 옷을 제때 못 사 입는 사람들이며, 멋지고 외모가 출중하고 현금이 많은 부자이기보다는, 주로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개당 1원짜리 양말 포장을 하고, 심각한 병이 들었어도 보험 든 것이 없어서 병원에 가기가 두려운 나머지, 늘 괜찮다고 말하는 그런 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감사하라고 곁에 두신 분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사람들을 향해 감사의 말과 좋은 말로 축사할 수 있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미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8-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기도문’(마 6:9-13)
    가장 행복한 사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늘 대화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주 안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그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본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느 곳이나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언제든지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가능합니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당당하게 기도할 특권이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름 안에 모든 복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복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짓된 교리와 부정직한 생활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원수들이 속히 돌이키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법을 우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의 삶에 미치게 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벧후 3:9)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해 전도와 선교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매일 새롭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첫째, 내일은 주님의 것이기에 내일에 대한 염려를 잊고 오늘 하루의 삶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마 6:34) 둘째, 양식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노력해서 정직하게 얻어야 합니다. 양식은 영의 양식까지 포함합니다.(마 4:4) 셋째, 매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도 죄인이며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죄를 값없이 용서받아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가족, 이웃, 민족 등 다른 사람의 죄를 같이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여기에 나오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유혹은 상대방을 멸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죄에 빠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요 13:2) 마귀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도 유혹합니다.(마 10:36)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지키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마 26:41)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죄악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확한 분별력과 지혜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8:5-6) 우리는 항상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롬 12:2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기도를 선하게 인도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아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 앞에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후 1:20) 모든 기도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자녀 된 특권을 풍성하게 누리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27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1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롬 6:5)
    오늘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6장 5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아멘. 우리는 지난 시간 로마서 6장 앞부분을 통해 세례가 가진 놀라운 영적 비밀을 살펴보았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물을 뿌리거나 교회의 의식을 치르는 절차가 아닙니다. 세례의 본질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그 연합의 첫 번째 결과는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장사되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아담의 옛사람, 과거의 상처와 정욕에 끌려다니던 옛 자아는 이미 2천 년 전 예수님의 무덤에 함께 묻혔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찾아와 "너는 여전히 죄인이다"라고 정죄할 때 우리는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네가 말하는 그 옛사람은 이미 장사되어 사라졌다. 지금의 나는 전혀 새로운 존재다." 이것이 세례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인 5절은 그 연합의 필연적인 결론을 선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만일'이라는 표현은 불확실한 가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분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확신의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과의 연합이 사실이라면 부활과의 연합 또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영적인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기독교는 가장 절망적인 종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연합한 우리 역시 그 부활 생명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과의 연합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우리는 아담의 생명을 이어받아 죄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한 부활 생명을 받은 새 피조물입니다. 신앙생활은 낡은 성품을 조금씩 고쳐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에서 여전히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이유는 신분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죄의 종으로 살아온 습관과 육신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믿음으로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입니다. "너는 또 넘어졌구나. 너는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내 노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경험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법적 근거 위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다.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죄는 더 이상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나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영적 싸움은 자신의 의지와 결심으로 죄를 이기려 애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믿음으로 내 것으로 붙드는 싸움입니다. 은혜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은혜는 죄의 결박과 통치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부활 생명과 연합한 우리는 이제 죄의 명령을 거부할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옛 주인이 아무리 명령하고 유혹해도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정죄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 힘 있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부활 생명의 능력과 성령의 충만하심을 공급받아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하나님 아래 진실한 무역’(겔 28:1~19)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 사람이나 나라마다 죄로 인해 악을 저지르고 타락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보기에도 힘든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니느웨 역시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타락했지만, 그러나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기회를 주셨고, 그들과의 사랑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니느웨도 결국 또다시 범죄함으로 나라가 망하는 길을 자초했지만, 그러나 오늘 나오는 두로의 경우는 니느웨의 경우와는 또 다른 성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고 부를 누렸지만, 하나님 앞에 심히 방자했고 교만했습니다. 특히 두로는 교만해져서 자신이 신과 같다고 말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까지 말한 나라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이나 단체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거나 들려오는 그러한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두로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연약하고 교만한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조금 인정을 받게 되고, 또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이 쉽게 교만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곧잘 YouTube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번 인기를 얻고, 한번 그 사람의 말이 옳다 옳다하여 칭찬받게 되면, 그 다음에 또 나와서 시청자의 구미에 맞는 또다른 좋은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칫 점점 다른 사람들, 다른 성도들, 다른 목회자들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여,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모습들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언론이나 이웃과 모든 사람들의 말에 너무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등장한 두로와 두로의 왕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로워서 다니엘보다 더 지혜롭고 모든 은밀한 것조차 전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기의 지혜와 자기가 행한 무역으로 인해서 재물을 얻었다고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재물로 인해 마음이 더욱 교만해졌음을 하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적하시고 또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로와 그 왕의 마음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듯 행했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방 여러 나라에 강포한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그들을 칠 것이고 칼을 빼어 그들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깊이 빠진 두로를 향해서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너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본문 말씀 중에는 두로와 두로의 왕이 무역하고 소유했던 각종 보석과 금은보화의 이름들이 즐비하게 망라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로와 그 왕은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아 여유롭고 넉넉했던 나라였고, 그러한 왕이었습니다. 즉 두로는 지음받던 날로부터 모든 길에 완전했었지만, 마침내 그에게서 불의가 드러났습니다. 그의 무역이 번성했지만, 거기에 강포함이 가득했고, 범죄했음이 지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이 잘될 때나, 높은 지위에 올라 성공의 가도를 가고 있을 때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만고의 진리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잘 되었을 때 교만해지며 하나님의 뜻을 업신여길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두로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 삼아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날마다, 시간마다 모든 상황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삶을 감당하며 덕을 이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표현하는 감사’(레 4:3-4)
    삶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다고,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표현하듯이 하나님께도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시대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를 드리면서 주님께 감사한 마음과 결단을 표현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는 죄 사함 받기 위해 속죄를 원하는 자가 그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속죄제 제물은 수송아지(제사장이나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할 때), 숫염소(족장의 죄를 속할 때), 암염소와 암양(평민의 죄를 속할 때), 비둘기 두 마리나 고운가루 10분의 1에바(가난한 자들의 죄를 속할 때)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번제는 흠이 없는 소와 양 등을 통째로 태워서 하나님께 바친 제사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다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소제는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운 가루를 그대로 봉헌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조리된 소제 예물을 봉헌하는 경우는 헌납자가 곡식 가루를 조리해서 화덕에 굽거나 냄비에 요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소제 예물을 드릴 때는 누룩이나 꿀은 섞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육신의 타락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룩이나 꿀의 첫 열매는 소제로 드릴 수 있었는데 태우지 않고 드렸습니다. 소금은 항상 쳤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결하며 깨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뜻합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감사하기 위해 드리는 것으로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제사장과 제사드린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소, 양, 염소는 드리되 비둘기는 안 되었습니다. 나누어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의 가진 모든 것, 즉 네 마음을 주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내 뜻대로 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배상이 따릅니다. 도둑질과 거짓맹세 때 드리는 속건제는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 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5: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고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고백에는 자신의 죄를 분명히 자각하고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겠다는 결단과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표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12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⑬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장에 들어서며 바울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섭니다. 앞서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칭의'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죄가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욱 크며, 아담의 실패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죄를 더 지어도 되는 것 아닌가?"라는 잘못된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드러날 것이라는 궤변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원어의 의미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강력한 부정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은혜를 핑계 삼아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알수록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그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더욱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권면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의 새로운 신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적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노예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노예가 평생 잔인한 주인의 명령 아래 살아갑니다. 주인이 시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비참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죽었습니다. 죽는 순간 주인의 모든 권리는 끝이 납니다. 주인이 무덤 앞에서 아무리 명령해도 죽은 노예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예전에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죄가 명령하면 거절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는 죄의 통치 아래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죄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고 연약함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여전히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익어 있던 옛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법적으로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 순사와 같은 제복만 보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리곤 했습니다. 신분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오랜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너는 아직도 죄의 종이다. 또 넘어졌으니 너는 여전히 내 것이다."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 죄는 더 이상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다." 이 진리를 붙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선포할 때 죄의 권세는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마음대로 지으라고 허락하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은혜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연약한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기억하십시오. 죄의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성령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령의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 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 1:17~2:10)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쳤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아 놓은 재물의 성, 세상 물건과 탐날만한 의식주 문제로 인생의 요새 같은 성들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음성과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곤 합니다. 세상 욕심을 따라가는 것이 무섭고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 그 말씀과 예배를 피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물건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그 말씀을 뒤로 했습니다. 불순종은 곧이어 하나님을 고민하시게 만들며, 그에 따라 주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깊은 영적 골방이었습니다. 밤낮 삼일동안 요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어디로도 도망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곡히 기도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죽음에 가까운 절망을 뜻합니다. 숨이 막히고, 길이 끊기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며, 생명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 가운데 던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큰 물과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덮었을 때,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자리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완전히 놓지 않았습니다. 물이 영혼까지 둘렀고, 깊음이 그를 에워쌌으며, 바다 풀이 머리를 감쌌습니다. 아직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피곤할 때,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신앙은 인생의 일이 잘 되고 원하는 대로 될 때보다는, 오히려 지치고 무너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거기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나의 기도는 깊은 바다 밑에서 드려졌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이르는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깊은 곳에서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기도를 받으십니다. 요나는, 헛된 우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길은 자유가 아니라 은혜를 상실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길은 자기가 잘 되는 것 같고 자기의 원초적인 욕심을 채워가는 것 같지만, 주의 일은 진척되지 않고 가정은 붕괴되며 죄악은 쌓여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돌이켜 하나님께 감사의 목소리로 제사하겠다고 고백하고, 서원을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선포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자,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냅니다. 요나를 삼킨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다시 내보낸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때로는 불순종 때문에 깊은 절망과 수렁의 자리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은 돌이킴의 자리이며 새로운 기회의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다시 살리기 위해 깨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둠 속에서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고, 절망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마침내 구원이 여호와께 속해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한 해의 남은 절반도, 주의 은혜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귀한 음성 속에서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7-08
비밀번호 :